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튀르키예 독립전쟁 (문단 편집) == 사카리아 전투의 기적과 전쟁의 종결 == 장장 21일 동안 전투는 밤낮없이 벌어졌다. 당시에 해당 방면으로 돌릴 수 있는 군대란 군대는 다 투입했기 때문에 앙카라 수비군도 전원이 이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케말은 말을 타고 최전선으로 나와서 장병들을 독려하였고 심지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노력 끝에 비록 전사자 수는 [[튀르키예군]]이 더 많았지만 어쨌든 그리스군의 진군을 최종적으로 저지시키는 데 성공했다. 여기서 다 이긴 전쟁을 왜 그리스군이 멈췄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군도 전 병력을 [[사카리아]]에 꼬라박았고 보급선이 너무나 긴데다가 그나마도 튀르크 민병대에게 지속적으로 습격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공세를 계속 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주류 해석이다.[* 특히 그리스의 인구가 적어서 열세였던 것도 원인이었다. 당시 그리스의 인구는 500만이었는데 튀르키예의 인구는 1400만으로 튀르키예가 그리스보다 압도적이었다.] 한 마디로 그리스군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랐기 때문에 공세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주력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튀르키예가 승기를 잡은 것이다. [[총력전]]에서 물량이 많은 국가가 결국 승기를 잡을 수밖에 없었고 마침 앙카라 앞에서 그리스군의 공세를 저지하게 되었던 것.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부, 남부전선의 상황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대국민의회군은 모든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결국 [[1922년]]에 이르면 도리어 튀르키예군이 그리스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코스탄티니예에서 사건을 관망하던 열강들은 다시금 저울질을 시작했다. 대국민의회는 [[영국]]의 요청에 따라 이스메트 파샤를 특사로 파견했으며 [[스위스]]의 로잔에서 장장 1년여에 걸친 회의를 거듭했다.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와 동부 [[트라키아]](트라케) 일부 지역은 그리스 영토로, [[이즈미르]](스미르나)는 튀르키예 영토로 하며 튀르키예 측에 아나톨리아를 보전하겠다는 서양 열강들의 제안에 이스메트 파샤는 "'''우리 민족의 완벽한 독립이 아니면 회의 따위 때려치워라.'''"라는 초강경자세로 버티고 있었으며 [[소련]]은 물자까지 지원하면서 독립군을 지지하고 있었다. 대국민의회군은 [[1922년]]을 기점으로 튀르키예 전국에서 그리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22년]] [[8월 30일]] 퀴타햐 인근의 둠루프나르에서 케말이 이끄는 튀르키예군이 완승을 거두면서 더 이상 열강들도 시간을 끌 수 없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0px-Turkish_infantry_in_trench.jpg]] 참호에서 대기 중인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군의 모습. [[파일:external/www.bodrumbaskisi.com/30Agustos1924DumlupinarSehitAskerAniti.jpg]] 전투 직전 아타튀르크(왼쪽 앞)과 [[이스메트 이뇌뉘]]의 모습(오른쪽 앞). 둠루프나르 전투에서 승리한 [[튀르키예군]]은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해 [[9월 9일]] 그리스군의 아나톨리아 본거지였던 이즈미르를 탈환했다.[* 이즈미르 탈환으로부터 4일 후 스미르나 대화재가 일어났다. 화재의 주체가 누구냐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튀르키예 대국민의회군은 이미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고 가뜩이나 인프라도 부족한 상황에서 대도시인 이즈미르를 불태울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며 당시 화재 책임에 대해서도 증언이 엇갈린다. [[미국]] 언론에서는 화재 발생 직후부터 튀르키예의 소행이라 추측하는 기사를 썼으나(영국, 프랑스 등 다른 언론들은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즈미르 소방국장이었던 파울 그레스코비치(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 국적)는 보고서에 아르메니아인 테러리스트의 소행이라고 써서 제출했으며 당시 헌병대장 캬즘 파샤가 방화 혐의로 체포한 아르메니아인 22명으로부터 자백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덧붙여 1922년 9월 3일부터 5일, 9월 5일부터 8일 사이에 그리스군은 각각 알라셰히르와 마니사에서 철수하면서 방화를 저질러 두 도시 인프라의 90%를 불태운 사건도 있었다. 이 두 사건은 명백히 그리스군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또 교사로서 이즈미르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영국인]] 알렉산더 맥라클란(Alexander MacLachlan)이 1922년 9월 25일 [[영국]] [[더 타임스]]에 "1919년 5월에 이즈미르에 들어온 그리스군은 튀르키예인들을 학살했으나 튀르키예군은 그러지 않았고, 해당 화재는 "서구의 개입을 바라는" 튀르키예 군복을 입은 아르메니아 테러단체가 저지른 일"이라고 기고했다. 아타튀르크와 튀르키예 대국민의회 측도 [[국제연맹]]에 해당 사건은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점을 호소했다.] 그리고 다 이긴 전쟁을 말아먹은 국왕 [[콘스탄디노스 1세]]와 왕당파 정권에 분노한 여론에 힘입어 [[https://en.wikipedia.org/wiki/Nikolaos_Plastiras|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Νικόλαος Πλαστήρας) 대령을 위시로 한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이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 정권을 붕괴시켰고 콘스탄디노스 1세 역시 퇴위하여 아들 [[요르요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 그리스는 메르츠(에브로스) 강 서쪽의 에디르네 인근의 카라아아츠를 포함한 트라키아 동부를 즉각 그리스로 넘기라고 주장했다. 동트라키아로 후퇴한 그리스군은 반격 준비에 나섰고 튀르키예군 역시 마지막 목표인 코스탄티니예와 동트라키아로 진격할 기미를 보이자 영국은 "[[보스포루스 해협]]이랑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오지 말라"고 대국민의회에 [[최후통첩]]을 날려 그리스를 보호하려 했으나 전쟁이 확전되는 걸 원하지 않던 다른 협상국들의 반대로 결국 영국이 물러섰다. 그렇게 해서 10월 11일 무다니아(Mudanya)에서 대국민의회와 협상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복귀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동트라키아 특히 에디르네만큼은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 노력했으나 결국 휴전에 동의하여 동트라키아에서 그리스군은 물러나고 대신 튀르키예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